리카르도 사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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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카르도 사모라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20세기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선수 시절 RCD 에스파뇰,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CF 등에서 활약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경험했으며, 스페인 국가대표팀과 카탈루냐 대표팀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20년 하계 올림픽 은메달, 1934년 FIFA 월드컵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었으며, 라 리가 최고의 골키퍼에게 수여되는 사모라 트로피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감독으로서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을 이끌고 리그 우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정치적 논란과 사생활 문제로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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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사모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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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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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리카르도 사모라 마르티네스 |
출생일 | 1901년 1월 21일 |
출생지 | 바르셀로나, 스페인 |
사망일 | 1978년 9월 8일 |
사망지 | 바르셀로나, 스페인 |
키 | 1.86m |
포지션 | 골키퍼 |
애칭 | El Divino (신) |
클럽 경력 | |
유소년 클럽 | 1914–1916: 우니베르시타리 SC |
선수 경력 | 1916–1919: 에스파뇰 (48경기, 0골) 1919–1922: 바르셀로나 (38경기, 0골) 1922–1930: 에스파뇰 (26경기, 0골) 1930–1936: 레알 마드리드 (82경기, 0골) 1937–1938: 니스 (9경기, 0골) |
국가대표 경력 | |
국가대표팀 | 1920–1936: 스페인 (46경기, 0골) 1920–1930: 카탈루냐 (정보 없음) |
감독 경력 | |
감독 경력 | 1937–1938: 니스 1939–1940: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1940–1946: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1946–1949: 셀타 1949–1951: 말라가 1951–1952: 스페인 1953–1955: 셀타 1955–1957: 에스파뇰 1960: 셀타 1961: 에스파뇰 |
수상 | |
올림픽 | 1920 앤트워프: 단체전 은메달 |
2. 클럽 경력
사모라는 우니베르시타리 SC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며, 아마추어 시절에는 원래 포워드였으나 골키퍼로서 프로 제안을 받고 포지션을 변경했다. 1916년 RCD 에스파뇰에 입단하여 1918년 카탈란 풋볼 챔피언십 우승을 경험했다.
1919년 지역 라이벌인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여 호세프 사미티에르, 파울리노 알칸타라 등 당대 스타 선수들과 함께 활약하며 카탈란 풋볼 챔피언십 3회 우승과 코파 델 레이 2회 우승을 차지했다.
1922년 다시 RCD 에스파뇰로 복귀했고, 1929년 라리가가 출범하자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같은 해 에스파뇰 소속으로 카탈란 풋볼 챔피언십과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끌었으며, 라리가 초대 시즌 최소 실점 골키퍼로 선정되었다.
1930년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했는데, 이 결정으로 인해 카탈루냐 지역에서는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그는 1931-32 시즌과 1932-33 시즌 팀의 첫 리그 2연패에 기여했으며, 1934년과 1936년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1936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경기 막판 보여준 결정적인 선방은 그의 경력에서 중요한 순간으로 기록된다.
스페인 내전 발발 이후 정치적 혼란 속에서 반정부 측의 선전에 이용되거나 정부 측에 의해 투옥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937년 프랑스의 OGC 니스로 이적하여[22] 한 시즌을 보낸 뒤 1938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2. 1. RCD 에스파뇰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사모라는 유소년 선수로 우니베르시타리 SC(Universitari SC)에서 경력을 시작했으며, 1916년 15세의 나이에 친선 경기를 거쳐 RCD 에스파뇰과 계약했다. 그는 1916년 4월 23일 마드리드 FC와의 경기에서 클럽 데뷔전을 치렀고, 무실점을 기록했다. 사모라는 1918년 에스파뇰이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에서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그의 부모는 아들이 의학 공부에 집중하기를 바랐으나, 파칸과 같은 동료들은 그가 선수 생활을 계속하도록 격려했다.[2] 그러나 1919년, 사모라는 가족의 뜻에 따라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에스파뇰을 잠시 떠났다.[2]
FC 바르셀로나에서 3시즌을 보낸 후, 사모라는 1922년 에스파뇰로 복귀했다. 1929년 2월 2일, 그는 라 리가 출범 시즌에 에스파뇰 소속으로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같은 해, 잭 그린웰 감독의 지도 아래 리카르도 사프리사와 함께 뛰며 에스파뇰의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우승과 구단 역사상 첫 코파 델 레이 우승(1929년)을 이끌었다. 코파 델 레이에서는 8강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준결승에서 FC 바르셀로나, 그리고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2-1로 꺾었다.[3] 또한 사모라는 라리가 초대 시즌 최소 실점 골키퍼가 되었다. 그는 에스파뇰 소속으로 총 26번의 라 리가 경기를 치른 후, 1930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2. 2. FC 바르셀로나
1919년 RCD 에스파뇰을 떠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다. 당시 잭 그린웰 감독이 이끌던 바르셀로나는 호세프 사미티에르, 사기바르바, 파울리노 알칸타라, 펠릭스 세수마가 등 뛰어난 선수들이 포진한 전설적인 팀으로 평가받았으며, 사모라는 이 팀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바르셀로나 소속으로 뛰는 동안 사모라는 팀의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3연패(1919-20, 1920-21, 1921-22 시즌)와 코파 델 레이 2회 우승(1920년, 1922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20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는 피치치가 이끄는 아틀레틱 빌바오를 상대로 2-0 무실점 승리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
1922년까지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한 후, 다시 RCD 에스파뇰로 복귀했다.
2. 3. RCD 에스파뇰 복귀
FC 바르셀로나에서 성공적인 3시즌을 보낸 후, 사모라는 1922년 RCD 에스파뇰로 복귀했다.[2] 1929년 2월 2일, 그는 라 리가 출범 시즌에 에스파뇰 소속으로 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같은 해, 잭 그린웰 감독의 지도 아래 리카르도 사프리사와 같은 동료들과 함께 뛰며 에스파뇰의 카탈루냐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과 구단 역사상 첫 코파 델 레이 우승(1929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3] 에스파뇰은 코파 델 레이 토너먼트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8강), FC 바르셀로나(준결승), 그리고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를 2-1로 꺾으며 정상에 올랐다.[3] 또한 사모라는 이 시즌 라리가 초대 최소 실점 골키퍼가 되었다. 에스파뇰 소속으로 총 26번의 라 리가 경기를 뛴 후, 그는 1930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게 된다.2. 4. 레알 마드리드 CF
1930년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을 맺었다. 이 이적으로 인해 카탈루냐에서는 배신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하친토 킨코세스를 포함한 여러 선수를 영입했는데, 사모라는 이들과 함께 1931-32 시즌 팀의 역사상 첫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다음 1932-33 시즌에는 FC 바르셀로나 시절 동료였던 호세프 사미티에르가 합류했고, 이들은 레알 마드리드의 리그 2연패를 이끌었다. 사모라는 두 시즌 연속으로 평균 실점률 1 미만을 기록하며 최소 실점 골키퍼(사모라 상의 유래)로 선정되었다.1934년 프란시스코 브루 감독의 지휘 아래 코파 데 에스파냐 (당시 명칭)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전에서는 잭 그린웰 감독이 이끌던 발렌시아 CF를 2-1로 꺾었다.[5] 1936년 코파 데 에스파냐 결승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FC 바르셀로나와 맞붙었다. 이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경기 종료 직전, FC 바르셀로나의 공격수 호세프 에스콜라가 시도한 결정적인 슛을 사모라가 극적으로 막아낸 덕분에 2-1 승리를 거두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6] 이 선방은 스페인 축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로 회자된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사모라는 정치적 혼란에 휘말렸다. 반정부(민족주의) 진영의 신문은 "사모라가 공화주의자에게 살해당했다"는 허위 보도를 통해 그를 선전에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사모라는 생존해 있었고, 이후 공화주의 정부 측에 의해 발견되어 투옥되었다. 풀려난 뒤인 1937년 프랑스의 OGC 니스로 이적했으며[22], 1938년 현역에서 은퇴했다.
2. 5. OGC 니스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자, 사모라는 정치적 혼란에 휘말렸다. 당시 반정부 측이었던 민족주의 계열 신문은 "사모라가 공화주의자에게 살해당했다"는 선전 기사를 내보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모라는 공화국 정부 측에 의해 발견되어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사모라는 1937년 프랑스의 OGC 니스로 이적했다[22]. 그는 OGC 니스에서 한 시즌을 보낸 뒤 1938년 현역에서 은퇴했다.3. 국가대표팀 경력
사모라는 1920년 처음으로 결성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1920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했고, 팀의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 그는 1934년 FIFA 월드컵에도 출전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쳐 대회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모라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총 46경기에 출전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와 더불어 사모라는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도 활약했으며, 최소 13경기에 출전한 기록이 있다. 그는 1920년대에 파울리노 알칸타라, 호세프 사미티에르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카탈루냐 대표팀에서 뛰며 코파 프린세프 데 아스투리에스(지역 대항전)에서 세 차례 우승을 경험했다.[22][21]
3. 1.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사모라는 1920년 처음 결성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에 호세 사미티에르, 펠릭스 세수마가, 피치치, 호세 마리아 벨라우스테 등과 함께 최초의 멤버로 선발되었다. 같은 해 프란시스코 브루 감독이 이끄는 스페인 대표팀 소속으로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 참가하여 은메달을 획득했다.[7] 이 대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가 결승전 도중 경기를 포기하면서 2위 이하 국가들의 순위 결정전이 열렸는데, 이 과정에서 치러진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사모라는 상대 선수를 폭행하여 퇴장당하기도 했다. 귀국 시, 쿠바의 아바나에서 규정 한도를 넘는 시가를 구매한 것이 적발되어 체포되기도 했다.[22]사모라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도 스페인 대표로 참가했다. 1929년 5월 15일, 마드리드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에서는 경기 초반 흉골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골문을 지키며 스페인의 4-3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 승리로 스페인은 영국 제도 밖에서 잉글랜드를 꺾은 최초의 팀이 되었다.[13][21][22]
1934년 FIFA 월드컵에도 스페인 대표로 출전하여 뛰어난 활약을 펼쳐 대회 최우수 골키퍼로 선정되었다. 사모라는 1920년부터 1936년까지 스페인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총 46경기에 출전했으며, 이 기록은 호세 앙헬 이리바르가 경신하기 전까지 45년 동안 스페인 선수 최다 출전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스페인 대표팀 외에도 카탈루냐 대표팀으로도 최소 13경기에 출전했다. 1920년대에는 파울리노 알칸타라, 에밀리오 사히 리냔, 호세프 사미티에르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카탈루냐 대표팀에서 활약하며 3번의 코파 프린세프 데 아스투리에스(지역 대항전) 우승을 이끌었다.
'''주요 참가 대회'''
- 스페인 대표팀
- *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 (은메달)
- * 1924년 파리 올림픽
- * 1934년 FIFA 월드컵 (대회 최우수 골키퍼)
'''국제 A매치 출전 기록'''
연도 | 출전 | 득점 |
---|---|---|
1920 | 5 | 0 |
1921 | 2 | 0 |
1922 | 2 | 0 |
1923 | 3 | 0 |
1924 | 3 | 0 |
1925 | 5 | 0 |
1926 | 1 | 0 |
1927 | 3 | 0 |
1928 | 2 | 0 |
1929 | 3 | 0 |
1930 | 3 | 0 |
1931 | 3 | 0 |
1932 | 1 | 0 |
1933 | 4 | 0 |
1934 | 4 | 0 |
1935 | 1 | 0 |
1936 | 1 | 0 |
통산 | 46 | 0 |
3. 2.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
사모라는 카탈루냐 대표팀 소속으로도 활약했으며, 최소 13경기에 출전했다. 다만, 당시 기록이 항상 정확하지는 않아 실제 출전 경기는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는 1920년대에 파울리노 알칸타라, 사기바르바, 호세프 사미티에르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사모라는 이들과 함께 RFEF가 주최한 공식 지역 간 대회인 아스투리아스 공작컵에서 카탈루냐 대표팀이 1923-24 시즌과 1926 시즌에 우승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8]4. 감독 경력
1939년, 사모라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당시 아틀레틱 아비아시온)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스페인 공군팀 '아비아시온 나시오날'과 합병하여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으로 팀명이 바뀌었다. 사모라의 지휘 아래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은 1940년 구단 역사상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1941년에도 타이틀을 방어했다.
1946년에는 셀타 비고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7-48 시즌에는 파이뇨, 미겔 무뇨스 등이 포함된 팀을 이끌고 리그 4위와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결승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1952년 6월에는 두 경기에 걸쳐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을 지도했다. 1953년에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라 살레 FC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셀타 비고로 복귀했으며, RCD 에스파뇰에서도 두 차례 감독직을 맡았다.
감독 우승 기록
클럽 | 대회 | 시즌 |
---|---|---|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 프리메라리가 | 1939-40 |
프리메라리가 | 1940-41 |
5. 플레이 스타일
사모라는 El Divino|엘 디비노es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경기장에서 천 모자와 흰색 폴로넥 스웨터를 착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이는 나중에 동시대 다른 선수들도 따라 하는 스타일이 되었다. 그는 이 복장이 햇빛과 상대 선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골키퍼로서 그는 뛰어난 운동 능력, 빠른 반사 신경, 슛을 막는 능력, 큰 체격, 그리고 골대 앞에서 보여주는 용감함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9][10][11][12]
그의 용감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1929년 스페인 대표팀 소속으로 잉글랜드와 경기할 때 가슴뼈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경기를 계속 뛰었던 일이 있다. 이 경기에서 스페인은 4-3으로 승리하며, 영국 제도 밖에서 잉글랜드를 꺾은 최초의 팀이 되었다.[13] 사모라는 또한 1936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경기 막판에 보여준 환상적인 선방으로도 기억된다.
6. 논란
사모라는 선수 시절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평소 코냑을 즐겨 마셨으며, 하루에 담배를 세 갑이나 피웠다고 전해진다.[1] 1920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이탈리아와의 경기 도중 상대 선수를 주먹으로 때려 퇴장당하는 사건을 일으켰다.[1] 또한, 올림픽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쿠바산 시가를 몰래 들여오려다 적발되어 체포되고 벌금을 내기도 했다.[1][2]
금전적인 문제와 이적 과정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1922년 RCD 에스파뇰로 이적하면서 받은 계약금을 세무 당국에 허위로 신고하여 집행 유예 1년과 출장 정지 1년 처분을 받았다.[1][2] 또한,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나 카탈루냐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고 FC 바르셀로나와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1930년 최대 라이벌 구단인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면서 카탈루냐 지역에서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1] 이때 받은 이적료 15만 페세타 중 4만 페세타만 실제로 받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
6. 1. 정치적 논란 및 스페인 내전
사모라의 정치적 성향은 논란의 대상이었다. 1934년 스페인 제2공화국으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았으나, 스페인 내전 중에는 프랑코 측 선전원들로부터 그들을 위해 경기를 뛰라는 압력을 받기도 했다. 전후인 1950년대에는 프랑코 정권으로부터 "정치적 공로"를 인정받아 1944년에 제정된 훈장인 시스네로스 십자 대훈장을 받았다.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자, ABC 신문은 공화파가 사모라를 살해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보도했다. 프랑코를 따르는 민족주의자들은 이 오보를 정치 선전에 이용하려 했다. 그러나 사모라는 살아 있었고, 오히려 그의 사망설 때문에 공화파 민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모델로 감옥에 수감되었다. 당시 감옥에는 라몬 세라노 수녜르와 라파엘 산체스 마사스 같은 인물들도 함께 있었다. 사모라는 감옥 소장 멜초르 로드리게스 가르시아의 도움과, 스스로 경비병들과 축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결국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중재로 석방된 사모라는 프랑스로 건너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OGC 니스에서 옛 동료 호세프 사미티에르와 함께 뛰었다. 그는 1938년 12월 8일 스페인으로 돌아와, 민족주의(프랑코파) 군인들을 위한 자선 경기에서 스페인 대표팀의 일원으로 레알 소시에다드를 상대로 뛰었다.
7. 수상 내역
잔피에로 콤비,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와 함께 그의 시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14]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도 꼽힌다.[15] 1999년, IFFHS는 사모라를 20세기의 스페인 최고의 골키퍼로 선정했으며, 유럽 4위, 전체 5위에 올랐다.[16][17] 같은 해, 그는 ''월드 사커'' 잡지에 의해 20세기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라 리가 최고의 골키퍼에게 수여되는 리카르도 사모라 트로피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7. 1. 선수

스페인
- 올림픽 은메달: 1920
카탈루냐 XI
- 아스투리아스 공작컵: 1922, 1924, 1926
RCD 에스파뇰
- 코파 델 레이: 1928–29
- 카탈루냐 선수권: 1917–18, 1928–29
FC 바르셀로나
- 코파 델 레이: 1920, 1922
- 카탈루냐 선수권: 1919–20, 1920–21, 1921–22
레알 마드리드
7. 2. 감독
사모라는 1939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당시 아틀레틱 아비아시온)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팀은 스페인 공군팀 '아비아시온 나시오날'과 합병하여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사모라 감독 체제 하에서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은 1940년 구단 역사상 첫 라리가 우승을 차지했으며, 1941년에도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1946년에는 셀타 비고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7-48 시즌에는 파이뇨, 미겔 무뇨스 등이 포함된 선수단을 이끌고 라리가 4위와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현 코파 델 레이) 결승 진출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1952년 6월에는 두 경기에 걸쳐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을 지도했으며, 1953년에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라 살레 FC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셀타 비고로 복귀했으며, RCD 에스파뇰에서도 두 차례 감독직을 맡았다.
'''감독 우승 기록'''
클럽 | 대회 | 우승 연도/기록 |
---|---|---|
아틀레티코 아비아시온 | 세군다 디비시온 | 1939 |
캄페오나토 레히오날 센트로 | 1939 | |
라리가 | 1939–40, 1940–41 |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 1940 | |
코파 페데라시온 센트로 | 1940–41 | |
셀타 비고 |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 준우승: 1947–48 |
7. 3. 개인
잔피에로 콤비,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와 함께 그의 시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14]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도 꼽힌다.[15] 1999년, IFFHS는 사모라를 20세기의 스페인 최고의 골키퍼이자 유럽 4위, 세계 5위 골키퍼로 선정했다.[16][17] 같은 해, 그는 ''월드 사커'' 잡지에 의해 20세기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라 리가 최고의 골키퍼에게 수여되는 리카르도 사모라 트로피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구분 | 대회 / 상 | 결과 / 순위 | 연도 / 비고 |
---|---|---|---|
스페인 | 올림픽 | 은메달 | 1920년 |
카탈루냐 XI | 아스투리아스 공작컵 | 우승 (2회) | 1923–24 |
1926 | |||
개인 | IFFHS 20세기 최고의 골키퍼 | 스페인 1위, 유럽 4위, 세계 5위 | 1999년[16] |
FIFA 월드컵 토너먼트 팀 / 최고의 골키퍼 상 | 선정 / 수상 | 1934년[20] | |
사모라 상 | 수상 (3회) | 1928–29, 1931–32, 1932–33 | |
월드 사커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100인 | 79위 | 1999년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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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aldo Pallone d'Oro, ma io avrei premiato Neu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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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mora, un mito div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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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 ingleses caen por primera vez... y en Madrid (1929)
https://as.com/futbo[...]
PRISA
201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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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ffon Prende Combi, punta Tacconi Se rinnova può arrivare a Zoff
http://archiviostori[...]
201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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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PIU' GRANDI NUMERI 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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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FHS' Century Ele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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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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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ardo Zamora, un ilustre en la porterí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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サモラからヤシン、“未来人”イギータを経て“スイーパー=キーパー”へ。GKの歴史と変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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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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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サモラ、V.バルデス、カシージャス――リーガを彩ってきた名GK史
https://www.football[...]
2022-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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